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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기자조선

광명인 2024. 11. 18. 16:10

[사마천의 사기, 송미자세가에 "武王乃封箕子朝鮮而不臣也(무왕내봉기자어조선이불신야), 즉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그러나 그를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기자조선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마천 사기의 원문을 직접 읽어보면 어떻게 이처럼 단순한 사료적 근거로 기자조선을 운운하는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위대한 역사서로서 평가를 받고 있지만, 군데 군데 섞여있는 그의 뻔뻔한 역사왜곡은 고대사의 진실을 아는 독자들에겐 정말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의 사기史記는 진정한 사기詐欺의 정석을 보여준다.

기자가 조선왕으로 봉해지는 내용은 매우 단순하다. 은나라 마지막 폭군인 주왕을 물리친 주나라 무왕기자를 찾아와서 하늘이 베푸는 상륜지도에 대해 묻는다. 이에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구주를 이야기해준다. 그러자 전후 맥락없이 대뜸 무왕은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봉하지만,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고 기록한다. 이게 기자조선 근거의 전부다. 정말 다른 내용은 없다. 이 내용을 근거로 조선의 유학자들기자조선을 주장해 왔던 것이다.

모든 깨달은 이들은 사건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인이 원하는 것, 믿고 싶은 것만을 과장되게 보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공자를 신처럼 모시고 사대모화(事大慕華)주의 사상에 빠졌던 당시 유학자들에겐 사마천의 이 한줄 사료는 미개한 조선을 개화시켜준 구원의 빛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역사는 반복된다. 따라서 특정한 사상이념 그리고 종교에 빠진 인간들에 의해 현재도 이와 같은 일들은 지속되고 있다. 역사 왜곡이란 것이 정말 이렇게 쉬운 것일까?]


기자조선은 한민족사를 그 출발부터 중국사에 예속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중국이 날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 역사서에서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예, 맥, 숙신 등의 제후국 이름을 내세워서 조선이라는 국가 이름자체를 제거했다. 

산동성 하택시 조현에 위치한 기자묘

사마천도 『사기』 「본기本紀」에서 조선이라는 호칭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런데 후국의 역사를 다룬 「세가世家」에서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이라 하여 갑자기 조선이란 이름을 썼다.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중국 사가들은 조선 역사가 약 3,100년 전에 중국의 제후국인 기자조선에서 시작된 것으로 단정한다.

『상서대전』, 『사기』 등에서 전하는 기자조선의 내력은 이러하다. 주나라의 건국자 무왕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기자를 풀어주었다. 이때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부끄러움을 참을수 없어 조선으로 떠나 버렸다.

소식을 들은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제후로 봉해진 이후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상서대전』은 기자가 책봉을 받은 후 신하의 예를 행하기 위해 주나라를 찾아가 무왕에게 홍범구주에 대해 설명하였다고 한다. 반면 『사기』는 기자가 책봉은 받았지만 ‘주나라의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而不臣也]’라고 기록하였다. ‘기자를 제후로 임명했다’는 말 바로 다음에 ‘신하로 삼지는 못했다’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후가 되면 당연히 신하가 되는 것인데도 그와 상반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기자가 무왕의 신하였던 적이 결코 없기 때문에 사마천이 자신도 모르게 역사의 진실을 고백한 것이다. 요컨대 기자라는 인물이 조선 왕으로 봉해진 일은 결코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기자가 조선으로 떠나 버렸다[走之朝鮮]’는 구절이다. 이것 동방 땅에 그전부터 조선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천명한 내용이다. 기자가 망해 버린 고국을 떠나 이웃나라 조선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단군조선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이 기자조선을 내세워 단군조선을 숨기려 하였으나, 오히려 더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중화사대주의로 인해 은나라 사람 기자가 단군을 이은 정통으로 보고 평양에 기자묘를 만들다.

25세 단군 솔나 재위 88년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세워짐) [단군세기 원문보기 클릭]
솔나단군의 재위 원년은 신해(환기 6048, 신시개천 2748, 단기 1184, BCE 1150)년이다. 
재위 37년 정해(단기 1220, BCE 1114)년에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살면서 인사를 사절하였다. 

단군세기를 보면 기자25세 솔나 단군 재위시에 살았던 인물로 단군세기에도 나온다. 이때 서토에서는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섰던 때인 것이다. 단군세기는 이때 기자는 인간사의 일에 개입하지 않았다[謝絶人事]고 전한다. 

서화西華: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허주許州에 "서화는 옛 기箕의 땅이다. 개봉부 서쪽 90리에 있다. 처음에 기자箕子가 송나라 기箕땅에 살았기 때문에 기자라 칭한 것이다. 지금 읍 가운데 기자대가 있다."라고 하였다. 서화는 지금의 하남성 개봉 남쪽 약 100킬로미터 지점에 있으며 그곳에 기자독서대가 있다. 기자묘산동성 조현에 있다. 

기자箕子: 기자는 은나라 왕실의 근친인 ‘다자多子’출신의 제후로서 성은 子, 이름은 서여胥餘이다. 기箕는 나라 이름이고 자子는 작위爵位 명칭이다. 정인보는 기자의 ‘기’는 우리 고어의 ‘검’ 으로 천왕天王을 뜻한다고 했다. 다름아닌 단군이라는 뜻이다. 은나라 말기에 기자가 봉해졌던 기국箕國은 은나라 왕실의 직할지인 '하남성 상구현商丘縣’으로 추측되고 있다(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 그러나 기국의 위치와 기족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는 기록은 문헌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

결론적으로 기자조선설은 일찍이 최남선도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 고대사를 중국사에 흡수 통화시키기 위해 중화주의 천하 사상이 조작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사마천이 조작한 이 기자조선설은, 후대에 당唐나라와 일제 때에 사대 식민주의 사학이 공통으로 날조한 '낙랑군 평양설(한사군의 한반도 북부 위치설)', 일제가 한국 침략과 식민지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 · 합리화시키기 위해 날조한 ‘임나일본부설(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가야 지방 지배설)'과 함께 한·중·일 동양 역사상 3대 역사 조작극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조작극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역사를 날조한 본보기인 것이다.

기자는 상나라가 망한 후 고향인 하남성 서화西華로 돌아가 살다가 산동성 조현曹縣에 묻혔다. 따라서 문헌과 고고학 유물을 수용한다면 상나라 기내畿內인 하남성 중남부 지역에 살던 기자국의 후손 일부가 주나라를 피해 북경과 요서지역으로 이동, 정착하여 고조선의 제후국이 되어 왕 노릇을 하였다고 추정할 수는 있다. 


사마천 사기의 《宋微子世家 송미자세가》 [원문보기 클릭]
 
箕子者, 紂親戚也.
기자자, 주친척야.
紂始為象箸, 箕子嘆曰: 彼為象箸, 必為玉桮; 為桮, 則必思遠方珍怪之物而御之矣.
주시위상저, 기자탄왈: 피위상저, 필위옥배; 위배, 즉필사원방진괴지물이어지의
輿馬宮室之漸自此始, 不可振也. 紂為淫泆, 箕子諫, 不聽. 人或曰: 可以去矣. 
여마궁실지참자차시, 불가진야.  주위음일, 기자간, 불청. 인혹왈: 가이거의.
箕子曰: 為人臣諫不聽而去, 是彰君之惡而自說於民, 吾不忍為也. 乃被髪詳狂而為奴. 
기자왈: 위인신간불청이거, 시창군지악이자열어민, 오불인위야. 내피발양광이위노.
遂隱而鼓琴以自悲, 故傳之曰箕子操
수은이고금이자비, 고전지왈기자조.

기자(箕子)는 주(紂)왕의 친척이다.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쓰기 시작하자 기자는 탄식하며 말했다. “그가 상아 젓가락을 만들었으니 틀림없이 옥으로 술잔을 만들 것이고, 옥 술잔을 갖게 되면 틀림없이 먼 곳의 진기하고 괴이한 물건들을 차지하려 할 것이다. 수레와 말과 궁궐을 갖게 될 조짐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며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주왕이 제멋대로 쾌락에 빠지자, 기자가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누군가가 말했다. “떠나야함이 마땅합니다.” 기자가 말했다. “신하된 자가 간언했는데도 듣지 않는다고 떠나면 이는 군주의 잘못은 드러내고 자신은 백성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니 나로서는 차마 그렇게 못하겠다.” 이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여 노예가 되었다. 마침내 숨어서 스스로 슬퍼하면서 거문고를 연주하였으므로 이 곡조가 ‘기자조(箕子操)’라고 전해지고 있다.

王子比干者, 亦紂之親戚也. 見箕子諫不聽而為奴, 
왕자비간자, 역주지친척야. 견기자간불청이위노,
則曰: 君有過而不以死爭, 則百姓何辜! 乃直言諫紂.
즉왈: 군유과이불이사쟁, 즉백성하고! 내직언간주.
紂怒曰: 吾聞聖人之心有七竅, 信有諸乎? 乃遂殺王子比干, 刳視其心.
주노왈: 오문성인지심유칠규, 신유제호? 내수살왕자비간, 고시기심. 

왕자 비간(比干) 역시 주(紂)왕의 친척이다. 기자가 간언해도 듣지 않고, 기자가 노예가 되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군주에게 허물이 있는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따지지 않는다면 무고한 백성들만 피해를 입지 않겠는가!” 이에 주왕에게 직언하여 간하였다. 주왕이 노하여 말했다. “내가 듣기에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던데 정말 그런가?” 하며 끝내 왕자 비간을 죽여 그의 가슴을 열고 심장을 보았다.

微子曰: 父子有骨肉, 而臣主以義屬. 故父有過, 子三諫不聽, 則隨而號之; 人臣三諫不聽, 則其義可以去矣. 
미자왈: 부자유골육, 이신주이의촉. 고부유과, 자삼간불청, 즉수이호지; 인신삼간불청, 즉기의가이거의.
於是太師, 少師乃勸微子去, 遂行.
어시태사, 소사내권미자거, 수행.

미자가 말했다. “아비와 자식 사이에는 골육의 정이 있고, 군주와 신하는 의리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 아비에게 잘못이 있으면 자식은 세 번을 간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자식은 계속 통곡할 따름이다. 신하된 자가 세 번을 충고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그 의리상 군주를 떠나도 괜찮다.” 이에 태사와 소사가 미자에게 떠날 것을 권하니 마침내 떠났다.
 
周武王伐紂克殷, 微子乃持其祭器造於軍門, 肉袒面縛, 左牽羊, 右把茅, 膝行而前以告. 於是武王乃釋微子, 復其位如故。
주무왕벌주극은, 미자내지기제기조어군문, 육단면박, 좌견양, 우파모, 슬행이전이고. 어시무왕내석미자, 복기위여고. 

주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토벌하여 은나라를 물리치자 미자微子는 이에 종묘의 제기를 들고 군문(軍門)으로 가서 웃통을 벗고 등 뒤로 손을 묶은 다음, 왼쪽 사람에게 양을 끌게 하고 오른쪽 사람에게는 띠를 가지게 하여 무릎으로 걸어 무왕의 앞으로 나가 고하였다. 이에 무왕은 미자를 석방하고 전과 같이 그 지위를 회복시켰다.

武王封紂子武庚祿父以續殷祀, 使管叔, 蔡叔傅相之.
무왕봉주자무경녹보이속은사, 사관숙, 채숙부상지.
 
주 무왕(周 武王)은 은나라 주(紂)왕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에게 은나라 왕조의 제사를 잇게 하고,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시켜 그를 보좌하게 했다.

武王既克殷, 訪問箕子.
무왕기극은, 방문기자.
武王曰: 於乎! 維天陰定下民, 相和其居, 我不知其常倫所序.
무왕왈: 어호! 유천음정하민, 상화기거, 아부지기상륜소서. 

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물리친 후 기자(箕子)를 찾아가 물었다. 무왕이 말했다. “오오! 하늘이 백성들을 어루만져 그들을 안정시키고, 서로 화합하며 살아가게 하시나, 나는 그 상륜(常倫, 우주의 이치에 따라 변화하는 윤리)이 베풀어지는 바를 모르겠습니다.”

箕子對曰: 在昔鯀陻鴻水, 汨陳其五行, 帝乃震怒, 不從鴻範九等, 常倫所斁.
기자대왈: 재석곤인홍수, 골진기오행, 재내진노, 부종홍범구등, 상륜소두.
鯀則殛死, 禹乃嗣興. 天乃錫禹鴻範九等, 常倫所序.
곤즉극사, 우내사흥. 천내석우홍범구등, 상륜소서. 

기자가 대답했다. “옛날 곤(鯀)홍수를 막으면서 오행의 질서를 어지럽히자 상제上帝(여기서 제帝는 초대 단군왕검을 뜻함)께서 크게 노하여 아홉 가지 큰 규범[홍범구주, 洪範九疇]을 주시지 않아 세상의 상륜(常倫)이 이로써 흐트러졌습니다. 곤이 죽임을 당하고 우(禹)가 그 일을 이어서 일으켰습니다. 하늘(단군왕검)은 곧 우(禹)에게 아홉 가지 큰 규범을 내리시어, 이에 따라 세상의 상륜을 다시 찾게 된 것입니다.” [단군왕검의 오행치수법 전수내용 보기 클릭]

[홍범구주의 내용 보기 클릭],,,,

於是武王箕子朝鮮而不臣也.
어시무왕내봉기자어조선이불신야.

이에 무왕은 기자조선(朝鮮)에 봉하되, 신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