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와 우연의 손길
[역사를 공부하는 다양한 목적중 하나는 과거의 사건들을 통해 현재에 대한 명확한 통찰력과 미래를 정확히 내다보는 안목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히 역사적 지식의 축적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통찰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이 순환 변화하는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하며, 둘째로 역사학이 간과하는 우연적 요소, 즉 역사에 개입하는 보이지 않는 손길인 신神의 작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변화의 이치와 신도의 작용을 깨달아야만, 역사 속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최근 대한민국 정치는 보수와 진보의 극단적 이념 대립으로 혼돈의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그럼, 이러한 극단적 대립의 근본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그 원인을 짧게는 1945년 대한민국 광복후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시기까지 펼쳐진 약 3년간의 혼돈의 역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역사는 단순한 반복은 아니지만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일들은 동일한 패턴으로 일어나게 된다. 대한민국의 급속한 발전은 한마디로 과거로부터 응축된 원한의 에너지가 터져나온 결과라 할 수 있다. 현재 보수와 진보의 극렬한 대립도 일종의 해원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아래 글은 황현필 강사의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대한 역사 강의를 바탕으로 우연으로 치부되는 역사에서 신도의 개입을 설명한 내용이다.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상당히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많은 반론과 의문이 뒤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성급하게 무시하거나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하지 않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하나하나 내용을 곱씹으며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반드시 세상이 흘러가는 대세를 명확히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얻게 될 것이다. 나아가 조만간 닥칠 지구촌 대병겁의 환란을 슬기롭게 극복할 지혜와 힘 또한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바이다.
이법(理法), 신도(神道), 그리고 역사(人事)는 결코 따로 떼어낼 수 없는 진리를 구성하는 세 가지 필수 요소이다.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 세 가지를 함께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이신사理神事의 법칙을 바탕으로 한 신도의 작용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역사가 왜 그렇게 안타깝게만 흘러오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고, 또한 현재 대한민국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지금은 좌우의 정치적 이념에 빠지지 말고, 중도적 입장에서 새롭게 다가올 영성시대를 준비해야 할 때이다.]
대한민국은 어떻게 수립되었을까요? 많은 사람이 8월 15일을 해방과 독립의 날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독립’이라는 단어보다는 ‘해방’이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당시 남북한이 허리가 잘린 채로 홀로 설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립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해방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1945년 8월 15일 밤부터 태극기를 들고 특히 8월 16일에 많은 이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때 외친 표현은 "조선 독립 만세"가 아니라 "대한독립 만세"였습니다. 이는 조선이 무너지기 직전인 1897년 10월 12일에 대한제국이 수립되었기 때문이며, 그 이후로 우리는 ‘한국’이었기에 "대한독립 만세"라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다가올 것을 미리 알고 있던 민족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지도자는 바로 여운형입니다. 여운형이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총독부와도 교류했던 인물입니다. 여운형은 총독부의 총독과 만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고, 일본 왜왕을 만나서 일본의 식민지배의 부당함에 대해서 직접 지적했던 유일한 조선인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광복일을 미리 알고 있었던 인물은 여운형 선생만이 아니다. 당시 보천교를 신앙한 몇몇 도인들도 대한민국이 광복될 날을 강증산 상제님께서 비전한 아래 말씀을 통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세상의 사건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 세상이 흘러가는 중요한 대세는 마치 해가 떠고 지는 것 처럼 이미 세부적인 내용까지 정교하게 결정되어져 있다. 따라서 신도가 밝은 이들의 예언이란 것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비결이나 예언을 믿고 말고는 각자의 마음이겠지만, 사실 비결을 통해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여 대비한 지혜로운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가 없는 이들은 들어도 그 내용을 정확히 해석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래 말씀에 대한 풀이는 블러그를 참조해 보라.
三人同行七十里요 五老峰前二十一이라
삼인동행칠십리 오로봉전이십일
七月七夕三五夜요 冬至寒食百五除라
칠월칠석삼오야 동지한식백오제 (증산도 도전 5:407장)]
당시 총독부의 정무총감 엔도는 여운형을 찾아왔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설은 엔도가 여운형을 총독부로 불렀다는 것이고, 두 번째 설은 여운형의 딸, 여연구가 쓴 책[나의 아버지 여운형]에 나오는 내용으로, 엔도가 굉장히 점잖게 직접 여운형의 집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오셨냐? 여운형은 그를 집 안으로 들여 커피를 대접했다고 합니다. 엔도가 여운형에게 "우리 일본이 곧 미국에 항복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곧 독립을 맞이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식은 여운형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일본이 미국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조선에서 폭동이 일어나서 당시 조선에 있던 60만 명의 일본인이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 측에서는 여운형에게 "정권 이양을 해드리겠으니 우리 안전을 책임져주십시오"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엔도는 사실상 정권을 이양하겠으니 일본인의 안전을 책임져 달라고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여운형은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 후,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심사숙고했을 것입니다. 그는 조선 총독에게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 조건에는 당연히 건국을 방해하지 말라는 내용, 서대문 형무소의 정치·경제 사범을 석방하라는 요구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 중 가장 특이한 조건은 "서울의 3개월치 식량을 확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1945년 8월 달인데,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일본이 1938년부터 총동원령을 선포하여 모든 가축과 금속과 곡식을 국가가 강제로 징발하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인들은 국가가 배급하는 식량에 의존해야만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만약 일본이 갑자기 철수하면서 모든 곡식을 가져가 버리면, 10월 추수 때까지 조선인들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운형은 이런 점을 고려하여 식량 확보를 조건으로 제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많은 것들이 생략되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독일이 패망한 지 정확히 100일이 되는 8월 8일에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돌아보면, 마치 한반도는 신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불운한 역사적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에 원폭이 투하된 신도 차원의 배경은 무엇일까? 증산도 도전에 의하면 일본이 참혹한 패망을 맞이 한 근본 원인은 일본이 조선과 미국에 대해 배사율을 범했고, 전쟁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그 원한의 에너지가 구천에 사무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 패망의 결과는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이전에 이미 예정되었던 사실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 마다 우연의 손길이 작용했으며, 역사는 단지 합리적이며 이성적 인과 관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도의 작용을 모르면, 그 우연의 손길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천지에 정의가 없는 것 같지만, 장시간를 통해 살펴보면 천지의 정의는 무엇보다도 엄정하게 적용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자는 히로시마 원폭에 대해 신이 어찌 그리 가혹할 수 있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의 제 1법칙은 인과율이다. 만약 불의한 행위에 따른 응징이나 보복이 사회적, 국가적 차원이나 자연적 차원에서 이루어 지지 않는다면 가정이나, 세상, 그리고 우주 조차도 혼돈으로 빠져 그 시스템은 붕괴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도 봄엔 무한한 사랑을 베풀지만 가을엔 모든 것들을 주락시키는 완전한 소멸을 주장하며 진화해 가는 것이다.
"일본 사람이 미국과 싸우는 것은 배사율(背師律)을 범하는 것이므로 장광(長廣) 팔십 리가 불바다가 되어 참혹히 망하리라." 여기서 장광은 나가사끼(長崎)와 히로시마(廣島)를 말한다. (증산도 도전 5:119장)
“천지의 대덕(大德)이라도 춘생추살(春生秋殺)의 은위(恩威)로써 이루어지느니라... 의로움(義)이 있는 곳에 도(道)가 머물고, 도가 머무는 곳에 덕(德)이 생기느니라.” (증산도 도전 8:62장)]
저는 이 과정에서 미국의 결정이 다소 얄밉다고 느껴집니다. 일본을 패망시키는 데 있어 이미 충분한 군사력을 가진 미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여를 독촉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약속했던 100일이 다가오기 이틀 전에 원폭을 투하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소련의 대일전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꼭 이 시점에서 원폭을 사용해야 했을까요?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이유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일본이 항복하는 과정에서 관동군과 같은 강력한 군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 군인들의 희생이 클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소련을 전쟁에 끌어들여 그 부담을 나눠야겠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많은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소련에게 어느 정도 역할을 나눠줘야 한다는 입장에서 원자폭탄을 보여주며 참전을 독려하려 했습니다. 그러면 패전국인 일본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점령을 당하고 분단이 되어야 했지만, 미국은 일본을 소련에게 넘겨주기 아까워하면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사할린 지역을 소련에게 떼어주고, 대신 한반도 북쪽을 소련에게 맡기게 됩니다.
이런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한반도의 분단을 이야기할 때 미국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전적으로 미국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고, 당시 우리에게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모든 나라는 자기 국익을 우선시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해방을 맞이하기 전, 이미 38도선은 그어져 있었고, 해방이 될 것을 가장 먼저 알았던 인물은 여운형이었습니다. 여운형은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설립합니다. 원래 해방되기 전인 1944년에 안재홍이라는 우파적 인물과 좌우 합작으로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단체를 만든 바 있습니다. 해방 당일 여운형은 즉시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을 만들고, 전국적으로 140여 개 군에 치안을 담당할 조직, 치안대를 설치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행정과 치안에 공백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을 대비해 여운형이 주도적으로 치안을 조직해서 나름 행정 공백 상태를 막아낸 것입니다.
[동양우주론에 의하면 3과 8수는 동방 목木기운을 상징한다. 따라서 3과 8은 동방의 시원 문화를 창조했던 한민족을 상징하는 숫자라 할 수 있다. 이 푸른 동방의 목기운을 상징하는 38선이 한반도의 중심을 가로질러 남북이 분단되고, 이것을 바탕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궁극적으로 이 전쟁은 세계를 통일할 마지막 대전쟁으로 이어질 것임을 120여 년전에 미리 밝혀놓은 분이 있다.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이 되었다. 이제 이 상씨름이 넘어가는 시점이 된 것이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현하대세가 씨름판과 같으니 애기판과 총각판이 지난 뒤에 상씨름으로 판을 마치리라.” 하시고 종이에 태극 형상의 선을 그리시며 “이것이 삼팔선이니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씨름판대는 조선의 삼팔선에 두고 세계 상씨름판을 붙이리라. 만국재판소를 조선에 두노니 씨름판에 소가 나가면 판을 걷게 되리라. (증산도 도전 5:7장)
“이 뒤에 상씨름판이 넘어오리니 그 때는 삼팔선이 무너질 것이요, 살 사람이 별로 없으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장차 바다가 육지 되고, 육지가 바다 되는 세상을 당하리라. 인종씨를 추릴 때는 병으로 다 쓸어 버릴 것이니 십 리 안에 사람 하나 볼 듯 말 듯하게 되느니라.” (증산도 도전 11:263장)]
8월 15일 이후 해방된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여운형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은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고, 남한에는 아직 맥아더는 일본에 있고, 미국이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점점 맥아더 장군이 한반도로 진주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자 여운형은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정부적 성격을 가진 단체를 만들어야 협상에서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건준을 개편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설립하게 됩니다. 이 단체는 훗날 북한의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이름이 유사하지만, 조선인민공화국은 여운형이 주도한 조직이었습니다. 줄여서 ‘인공’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역사 공부를 한 사람들 중 여운형을 높이 평가하고 멋지다고 여기는 이유는 그가 당시 권력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최고 자리에 오르지 않겠다고 하면서 민족주의 우파의 대표였던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하려 했고, 자신은 부주석 자리에 머무르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송진우, 김성수 같은 우익 인사들과 함께 협력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주석 자리를 거부했습니다.
김성수와 송진우는 여운형의 사회주의적 성향을 이유로 그와 협력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충칭 임시정부와 손을 잡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인민공화국, 즉 ‘인공’은 다소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어 보이게 되었습니다. 여운형은 인공을 기반으로 전국의 치안대를 인민위원회로 개편했고, 145개의 인민위원회가 각 지역에서 자치를 담당하면서 친일파들을 척결하게 됩니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자치를 인정하며 관리에 나섰고, 그로 인해 북한에서는 각 동네마다 친일파들이 죽어 나갑니다. 반면 남한에서는 인민위원회를 무력화시킵니다. 곧 들어오게 될 미군정과 김두한을 비롯한 반공세력들, 청년 단체들이 활동하면서 인민위원회의 영향력을 무력화 시켜요.
9월 7일, 미군정이 시작되며 맥아더 장군이 포고령을 발표했습니다. 동시에 북한에서는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두 사령관의 포고령 내용이 다소 대조적이어서, 과거 금성 교과서에서는 미군을 ‘점령군’,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명박 정권 시기 근현대사 교과서 개정 논란이 있었고, 해당 표현이 삭제되었습니다.
역사를 공부할 때 중요한 것은 단순한 이분법적 시각이 아니라, 왜 당시 미군과 소련이 각각 그러한 포고문을 발표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은 크게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어 전개되었습니다. 원래 사회주의의 반대 개념은 자본주의여야 하지만, 일제 식민통치하에 그 독립운동가들을 자본주의 계열로 지칭하는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사회주의자가 모두 독립운동가는 아니지만,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사회주의자였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계가 모두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친일파 대부분이 자본주의자들이었다는 점도 사실입니다. 이 문장은 독립운동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사회주의 계열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후 남한과 북한에서 대중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에 더 큰 지지를 보냈습니다.
소련이 한반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을 표명한 것은 한반도 인민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빨리 자발적으로 국가를 수립하게 만들어 자신들의 위성 공산 국가로 만들기 위한 전략적 계산이었습니다. 반면, 미군은 한반도에 대한 정보를 주로 일본으로부터 수집했으며, 한반도 상황을 잘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사회주의 세력이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시간을 벌어야겠다고 판단하고 포고령을 발표한 것입니다.
결코 미국이 나쁘고 소련이 착해서가 아니라, 양측 모두 자기 이익을 위한 행동이었고, 소련도 명백히 점령군이었음에도 포고문 내용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맥아더 포고문이 발표된 다음 날인 9월 8일, 미군은 인천에 상륙했고, 9월 9일에는 서울에 도착하여 조선 총독부에 걸려 있던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했습니다. 해방을 맞이한 날, 조선 총독부에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올라간 것입니다.
한편, 북한은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한 날을 9월 9일로 인식하고, 이를 기념하여 9월 9일을 국경일로 정했습니다. 미군정은 시작과 동시에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10월에는 상해 임시정부에 있었던 김구가 귀국했고, 11월에는 이승만이 귀국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회의가 열렸는데, 바로 12월에 열린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입니다. 앞서 카이로 선언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제스가 "적절한 시기에 한반도를 독립시키겠다"고 선언한 바 있었지만, 그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부 장관이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내용이 발표되기 전에 동아일보가 호외로 내용을 보도했으며, 당시 호외는 길거리에서 배포되었습니다. 이 호외에 담긴 내용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신탁통치라는 개념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큰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했는데, 다시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우리가 나라를 세울 능력이 없어서 미국, 소련, 영국 같은 나라들이 몇 년 동안 우리를 관장한다"는 설명에 분노했습니다. 당연히 곳곳에서 반대 운동이 일어나며 "우리는 곧바로 독립해야 한다, 몇 년 동안 외세의 통치를 다시 받고 싶지 않다"고 외쳤습니다.
특히 당시 민족주의 우익들은 "신탁통치를 주장한 소련은 나쁜 나라이고, 공산주의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며 반소 반공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을 비난하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신탁통치 반대 세력은 애국자로 칭송받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당시 세계 언론 역사에서 이 사건은 "10대 거짓말" 중 하나로 꼽힙니다. 신탁통치를 처음 제안한 나라는 미국이었고, 즉각 독립을 주장했던 나라는 소련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미국과 소련이 착하거나 나쁘다는 문제가 아니라, 소련은 빨리 한반도에 공산 국가를 수립하려 했고, 미국은 시간이 더 필요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 거짓 호외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동아일보의 사주였던 김성수가 이 과정에 관여했다는 설이 있으며, 일부에서는 미국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오보였는지, 의도적인 조작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소련은 자신들이 신탁통치를 주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받게 되었고, 억울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에 소련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전문을 공개할 테니 조선 민중들이 직접 읽고 판단하라"며 회의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논의된 조선민주주의 정부 설립 방안은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총선을 주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위해 미국과 소련의 대표가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최대 5년간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이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주된 목적은 임시정부를 통해 남북한 총선을 주관하여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소련의 입장은 분명했습니다. "지금 남쪽에는 이승만, 김구,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등이 권력을 두고 다투고 있고, 북쪽에서는 김일성이 권력을 잡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분단될 상황에서 신탁통치를 거부한다면 조선은 분단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분단을 막으려면 신탁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이를 조선 민중에게 설득하려 했고, 이를 지지하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문맹률이 80~90%에 달해, 이런 논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습니다. 이 글을 읽을 수 있었던 젊은 지식인들, 즉 '먹물들'은 대부분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습니다. 이들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강하게 전개하면 분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여, 신탁통치를 직접 지지하는 대신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과를 지지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민족주의 우익 세력은 사회주의자들을 "찬탁 세력"이라 비난하며 "반탁 운동"을 펼쳤습니다. 우익세력들은 "우리는 반탁을 주장하며 애국하려고 하는데, 너희 좌익들은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매국하려는 것이냐"고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결국 남한에서는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역사가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모든 우익이 친일파는 아니지만 친일파의 상당수는 우익에 속해 있었고, 모든 사회주의자가 독립운동가는 아니지만 독립운동가의 상당수는 사회주의자였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남한에서는 독립운동을 했던 사회주의자들이 "매국노"로 몰리고, 친일파였던 일부 우익 인물들이 "애국자"로 칭송받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남북한은 분단되었고, 이후 전쟁으로 인해 70년 이상 대립 상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방 직후 남북한이 총선을 통해 통일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면 분단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신탁통치에 대한 논란은 큰 갈등을 초래했습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이후 남한과 북한에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실제로 3년간 신탁통치를 당하며 분단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민족 지도자들의 행보를 보면, 박헌영은 대표적인 사회주의자로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해방 후 남한에서 미군정의 감시를 피해 북한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는 뛰어난 지식과 리더십으로 사회주의자들에게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러나 박헌영은 이후 김일성을 설득해 전쟁을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전쟁 이후 북한에서 미국의 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하며 남북 모두에서 잊힌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운형은 해방 후 가장 주목받는 지도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외모와 품성으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았으며,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해방 후 조선 중앙일보를 창간하며 민중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여운형은 사회주의자였으나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민족주의 세력과도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로 인해 여운형과 김원봉 같은 인물들이 오늘날 역사학자들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들이 소아병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여운형은 비록 사회주의자였지만 YMCA 활동을 이끌며 미국에서 야구를 도입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고, 교회의 목사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대체로 종교에 적대적이었음을 고려할 때, 여운형은 열린 사고와 포용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집안 배경이 훌륭했고 학문적으로도 뛰어났으며, 운동 실력과 외모까지 겸비한 완벽에 가까운 인물로,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가 이끌던 조선인민당은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며 사회주의자들과 중도층을 아우르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정치적 대립은 찬탁(신탁통치 지지)과 반탁(신탁통치 반대)으로 극명하게 나뉘었습니다. 여운형은 찬탁을 지지했고, 김구는 반탁을 주장했습니다. 김구가 반탁을 주장한 것은 역사적으로 비판받는 지점으로, 이를 두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김구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김구 본인도 이후 반탁을 주장했던 것을 후회한 바 있습니다.
김규식은 중도 우익으로 분류되며, 이 시기에 상황을 주시하면서 잠시 입장을 보류했습니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 따라 남북한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총선을 통해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계획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남한 내부에서 찬탁과 반탁 세력이 극심하게 대립하며 충돌이 발생했고, 결국 위원회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1946년 3월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두 달간 회의를 지속했으나 결국 결렬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은 반탁 운동 단체들과 임시정부 구성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고집을 부렸고, 미국 역시 모든 사회 정당과 단체를 포괄하는 정부 구성을 요구하며 복잡한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소련의 어거지로 인해 회의는 무산되었고, 미소공동위원회는 휴회에 들어갔습니다.
민족 지도자들은 신탁통치가 불쾌하긴 했으나 미소 양측이 타협하여 남북한 총선을 주관할 임시정부가 구성되길 기대했습니다. 당시 38도선으로 나뉘어 소련이 북한을 점령하고 김일성이 세력을 확장하는 상황에서도,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로 인해 불안감이 커졌고, 일부 지도층 인사들은 분단의 가능성을 우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민족 지도자 중 처음으로 남북 분단을 언급하며 전라북도 정읍에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합니다. "저 미소공동위원회의가 휴회가 되었고 다시 재개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한반도 남쪽에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북한 땅에서 소련이 물러날 수 있도록 세계 여론에 호소합시다."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 발언에 민족 지도자들은 깜짝 놀랐고, 분단이 곧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습니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한국독립당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한편, 이승만은 당시 미국에서 외교 활동을 하며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고, 한민당이라는 친일 지주 자본가 정당이 그와 손을 잡아 영향력을 넓히게 됩니다. 한민당은 원래 김구를 주석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김구가 이를 거절하자 이승만과 협력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김구는 이승만과 함께 반탁 운동을 전개했으나, 이승만이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즉 ‘단정론’에 반발하며 그와의 협력을 끊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김구는 이승만과의 협력을 중단하고, 또 다른 우파 지도자인 김규식은 여운형과 손잡아 좌우 합작 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만약 이 당시 중도가 우리 역사와 정치를 선도했더라면 지금 이렇게까지 안 됐을 텐데 남한과 북한은 결과적으로 이승만과 김일성이라는 분단주의자들에 의해 그들이 각각 짱이 되고 건국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까지 일어나면서 지금 이 상황으로까지 치 닫는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결성하여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했습니다. 이 원칙에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 따른 남북한 임시정부 구성과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는 신탁통치를 수용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되니 따라서 중도 우파인 김규식도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신탁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좌우 합작 운동은 남북한의 분단을 막기 위한 중요한 시도로 평가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1947년 5월에서 7월까지 열린 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1차 회의와 마찬가지로 결렬되었고, 이는 남북한의 분단을 막을 마지막 기회가 사라진 것을 의미했습니다.
초기에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 통일 정부를 세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양국 간의 적대감이 커지며 협력은 불가능해졌습니다. 결국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면서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졌고, 이후 남북한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분단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냉전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미국과 소련 간의 관계가 악화되며 협력 가능성이 사라졌고, 남북한 통일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미소공동위원회도 재개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운형은 임시정부 수립과 남북한 통일을 위해 연설을 다니며 신탁통치를 수용하더라도 통일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의 연설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이로 인해 단독 정부 수립을 원하는 세력에게는 여운형이 걸림돌로 여겨졌습니다.
결국 1947년 7월에 여운형은 암살을 당합니다. 한여름, 유리창을 내리고 이동 중이던 그의 차량이 우익 방공 청년단원 한지근에 의해 습격을 받았습니다. 여운형은 가슴에 총을 맞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습니다. 이후 한지근에게 권총을 건네며 암살을 지시한 배후로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 지목되었습니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좌우 합작 운동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마지막 시도는 무산되었습니다.
나중에 여운형을 죽인 청년은 한지근이라고 해 가지고 당시 우익 반공 청년단, 일종의 극우 테러단체인 백의사(白衣社) 단원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 한지근에게 권총을 주며 그 여운형을 죽이라는 걸 내가 명령했다는 사람의 육성 녹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장군의 아들 김두한입니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으로 냉전 체제 시작되었고, 1969년 닉슨 독트린으로 냉전 체제가 완화되었으며, 1990년 독일 통일과 1991년 소련 붕괴로 냉전 체제가 해체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중 패권전쟁으로 또다시 신냉전체제로 돌입한 상태이다. 2차 대전후 전세계 국제정세가 왜 냉전체제로 전환이 되었으며, 그리고 그 냉전체제가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후 완화, 해체되었다가 왜 지금에 와서 새롭게 신냉전체제로 돌입하여 마지막 최후의 대전쟁을 직면하게 되었는지 과연 누가 그 우연의 손길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국제 정치적 사건들이 모두 신명 정부에 의해 미리 계획된 것이라 주장하며 구체적인 논리적 근거들을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단체가 있다.
그러면 신도는 왜 이러한 일들을 계획하게 된 것일까? 궁극적으로 선천 상극의 질서속에서 쌓여온 지역간 혈연간 이념과 종교간 분쟁들, 모든 족속들의 시비와 원한을 완전히 해소시키기 위해서이다. 선천 역사를 통해 가장 원한이 컸던 시비는 계급과 빈부의 시비였을 것이다. 이러한 시비를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민주적 자본주의와 사회적 평등을 우선시하는 전제적 공산주의 이념의 대결구도로 만들어 국제정세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끔, 마치 대한민국을 둘러싼 주요 강대국들이 바둑판위에서 바둑을 두듯이 경쟁하도록 국제정치의 기본틀을 짰다는 것이다. [오선위기혈 클릭]
이후 이러한 냉전의 대립 구도를 해소시켜며 자유 민주적 자본주의체제가 승리하도록 역사는 흘러갔으나, 이후 부익부 빈익빈으로 자본주의의 구조적 한계와 미국 패권질서의 한계로 인해 세계는 신냉전 내지는 각자 도생체제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 결국 현 인류문명을 지탱해 왔던 사회, 금융 및 경제 시스템은 이미 한계를 드러낸 상태이며, 이를 대체할 새로운 이념이나 시스템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과도기적 암흑의 혼돈기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밤이 깊을수록 오히려 새벽은 가까운 법이다.
“회문산에 오선위기가 있나니 바둑은 당요가 창시하여 단주에게 전수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단주의 해원은 오선위기로부터 비롯되나니 천하의 대운이 이로부터 열리느니라.” 하시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로써 또한 조선의 시비를 푸느니라.” (증산도 도전 4:20장)
선천은 상극(相克)의 운(運)이라. 상극의 이치가 인간과 만물을 맡아 하늘과 땅에 전란(戰亂)이 그칠 새 없었나니 그리하여 천하를 원한으로 가득 채우므로 이제 이 상극의 운을 끝맺으려 하매 큰 화액(禍厄)이 함께 일어나서 인간 세상이 멸망당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천지신명이 이를 근심하고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고자 하였으되 아무 방책이 없으므로 구천(九天)에 있는 나에게 호소하여 오매 내가 이를 차마 물리치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내려오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내가 큰 화를 작은 화로써 막아 다스리고 조화선경(造化仙境)을 열려 하노라. (증산도 도전 2:17장)
“옛것을 그대로 지키고 있으면 몸을 망치고 새 기운을 취하면 몸도 영화롭게 되나니 나의 운은 새롭게 바꾸는 데 있느니라.” (증산도 도전 5:340장)]
이후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11월에 유엔 총회로 넘겼고, 유엔은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유엔 선거 관리 임시 위원단이 남한에서 인구 조사를 시작했으나, 북한과 소련은 위원단의 북한 진입을 막았습니다. 이는 북한의 인구가 남한보다 적어 총선 결과에서 불리할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이 총선 참여를 거부하면서 남북한 통일 정부 수립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남한과 북한에 각각 단독 정부가 세워졌습니다.
해방 직후 남한에서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사회주의자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미국이 남한에 자본주의 체제를 정착시키며 2년 동안 시간을 벌어 자본주의의 이점을 알렸고, 이에 따라 남한 내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은 약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소련과 북한도 파악하고 있었기에, 총선이 치러질 경우 공산주의 세력이 국회에 진출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해 유엔의 총선 계획을 거부한 것입니다. 따라서 분단의 책임은 소련과 북한이 짊어져야하는 것입니다.
국민장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기억하죠. 그런데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장은 실은 여운형의 국민장입니다. 이는 당시 여운형이 대중으로부터 얼마나 큰 지지를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후 여운형에 대한 평가는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다뤄졌으며, 그의 이름 여운형은 2005년부터 2013년까지 교과서에 실렸으나 현재는 다시 사라진 상태입니다.
1948년으로 넘어갑니다. UN 선거 관리 임시 위원단이 북한 진입을 시도했으나, 소련과 북한이 이를 거부하면서, 미국은 이 의제를 2월에 유엔 소총회에 넘깁니다. 유엔 소총회에서는 '선거 가능한 지역에서만 선거하자'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따라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결정되었습니다. 이는 사실상 한반도의 분단을 의미하는 결정이었고, 당시 이를 저지할 수 있는 중재자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여운형이 죽고 남은 중재자 역할은 김규식과 김구가 이어받았습니다. 김규식은 분단을 막기 위해 북한의 김일성에게 편지를 보내 회담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김일성도 표면적으로는 분단을 원치 않는 모습을 보이며 답장을 보냈지만, 이미 남한의 단독 선거가 기정사실화된 상황이었습니다.
4월이 되어 남한에서는 이미 선거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김규식이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을 만나는 일정이 추진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구는 큰 비판을 받았습니다. 우익 청년들은 김구가 북한에 가는 것을 반대하며, 그가 북한 정권과 손을 잡으려 한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김구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마지막 시도로 이 회담에 임한 것이었습니다.
김구는 단독 선거를 반대하며 남한과 북한이 함께하는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심정을 담아 '삼천만 동포에게 울며 고한다'라는 글을 발표하며 마지막까지 통일을 위해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한 단독 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한반도의 분단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1948년, 김구는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북한으로 가기로 결심하며 ‘3천만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깁니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유일한 염원이 통일된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공동 투쟁임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38선을 넘는 일이 자신의 목숨을 잃는 일이 되더라도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해 나아가겠다는 결의를 보였습니다. 김구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계획을 비판했습니다.
김구의 이러한 행보는 그가 단순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했던 지도자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됩니다. 그는 과거에 반탁 운동을 펼쳤던 것이 자신의 실수였다고 인정하며 통일된 정부 수립에 매진했습니다. 그 결과,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과 만날 준비를 하며 통일정부 구성을 위한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김일성은 과거 1937년 보천보 전투로 스타로 떠오른 인물이었습니다. 보천보 전투는 일본군의 부재 속에 소규모로 이루어진 전투였지만, 동아일보 등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김일성을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1920년대까지 독립운동의 주요 전투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 있었으며,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했습니다. 만주 사변 이후에는 지청천 장군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한중 연합 작전을 통해 쌍성보, 사도하자, 대전자 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영릉가와 흥경성에서도 격전을 치렀던 양세봉이라는 정말로 위대한 만주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또 다른 인물이 있었으며, 그는 남북한 국립묘지에 안장된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세봉이 일본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 사망하면서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양세봉의 부하들은 그의 시신이 일본군에 의해 훼손될 것을 우려해 평장(평평하게 묻는 방식)으로 시신을 안장했으나, 결국 일본군이 이를 찾아내어 시신을 훼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로 인해 만주의 독립운동이 사실상 끝났다고 한반도의 동포들 사이에서 만주에 더 이상 독립군이 남아있지 않다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그러던 중 김일성이 국내로 진격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동아일보가 호외로 보도하니 이로 인해 김일성은 한순간에 유명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의 운도 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충칭 임시정부나 화북조선독립동맹의 김두봉이나 최창익, 무정 이런 인물이 있었던 곳으로 모여들었는데, 김일성은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별도의 세력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위치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충칭이나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갔다면 당시 지도자들인 김구나 조소앙 등에 비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김일성은 당시 소련으로 들어가며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계산했겠습니까? 소련 입장에서도 독립적인 세력이 없고 지시를 잘 따르는 김일성이 이용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하여 그를 앞세웠습니다. 이후 김일성은 예상 외로 빠르게 권력을 장악하며, 자신보다 경험이 많은 선배 독립운동가들을 차례로 숙청해 나갔던 것이죠.
그런 김일성은 남한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규식을 불러 남북 협상을 제안했고, 이에 김구와 김규식이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948년 남북협상 운동이 진행될 당시,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 김규식은 부주석으로서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두봉 주석을 만났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으로 명성을 얻었고, 김두봉 주석은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주석이었습니다. 이들의 만남은 역사적으로 최고의 독립운동가 4명이 만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남북협상 운동이었습니다.
이 남북협상에서는 미군과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남북이 스스로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안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남한에서는 단독 총선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김원봉도 남북협상에 참여하였으나 여운형 선생의 죽음이후 여운형선생의 국민장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김원봉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결국 남한 사회에서 활동하는 데 한계를 겪게 됩니다.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남녀 평등에 입각한 보통 선거가 실시됩니다. 선거권은 만 21세 이상의 남녀에게 주어졌으며, 국회의원 임기는 4년이지만, 이때 초대 국회의원은 임기가 2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총 200개의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을 선출했지만, 다만 제주 4.3 항쟁으로 인해 두 곳에서는 선거가 치러지지 못했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통일정부 지향 세력과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5.10 총선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과거는 현재를 구성하는 토대이며, 따라서 언제나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왜곡된 원한의 에너지는 그 잠재적 파괴력이 매우 크다. 현재 일어나는 많은 재앙은 과거의 풀어지지 못한 원한의 에너지로 인함이다. 대한민국은 광복후 짧은 시간에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보기드문 국가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파생된 억울한 희생과 그로 인한 억눌린 원한의 에너지가 뭉쳐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광복후 남한에서 자행된 최초의 민간인 학살은 제주 4.3 항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원인중 하나는 북한에서 자행된 폭력과 그로인한 원한의 에너지가 남한의 권력과 야합해서 벌어진 일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렇게 축적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에너지는 결국 참혹한 재앙의 불씨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개벽기에 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해야하는지도 이 선천에 쌓여온 악업과 원한의 에너지로 인함인 것이다.
선천에는 상극의 이치가 인간 사물을 맡았으므로 모든 인사가 도의(道義)에 어그러져서 원한이 맺히고 쌓여 삼계에 넘치매 마침내 살기(殺氣)가 터져 나와 세상에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나니,,, (증산도 도전 4:16장)
“선천의 모든 악업(惡業)과 신명들의 원한과 보복이 천하의 병을 빚어내어 괴질이 되느니라. 봄과 여름에는 큰 병이 없다가 가을에 접어드는 환절기(換節期)가 되면 봄여름의 죄업에 대한 인과응보가 큰 병세(病勢)를 불러일으키느니라.” (증산도 도전 7:38장)]
이로 인해 이승만 계열과 한민당 계열의 후보들이 다수 당선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의외로 무소속의 젊은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다수 당선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하게 되었고, 이때 2년 간 국회의원직을 했던 국회를 ‘제헌국회’라고 부릅니다. 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습니다.
저는 이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명확히 밝혔기 때문입니다. 한편, 김일성은 나이가 어렸지만 매우 영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역시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싶어 했고, 빠르게 권력을 잡으려 했으나 역사적 분단의 책임을 지는 오명을 피하려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 이승만 박사가 남한 정부를 먼저 수립하자 김일성은 곧바로 1948년 9월 9일에 북한 정권을 수립하게 됩니다.
현재 우리는 분단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이 분단이 100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구의 멸망보다 한반도의 통일이 먼저 올 것이라고 99.9% 확신합니다. 언젠가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 후손들은 이 분단 시대를 돌아보며, 분단을 초래한 인물들과 이를 극복하려 했던 인물들을 역사 속에서 평가할 것입니다.
[지구 멸망은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천개벽, 즉 선천 문명의 종결과 한반도 통일은 동시에 오도록 120여 년 전에 미리 계획되었다. 앞으로 벌어질 대전쟁은 세상의 모든 이념대립의 시비를 끌러내는 마지막 해원 굿판인 것이다. 싸우면서 성숙한다는 말과 같이 선천의 마지막 끝자락에 인류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통해 인류의 전체 의식이 꽤 성숙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성숙을 이루지는 못한 상태, 이제 인류는 마지막 3차 대전쟁과 처절한 파멸을 통해 진정한 인류애를 절감하게 될 것이며, 이로인해 인류의 전체 의식은 비약적으로 도약을 할 것이다.
오랫동안 곪아 온 것은 반드시 한번 크게 터뜨려야 그 울분이 해소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상생의 시대는 이러한 완전한 해원을 통해서만 열리는 것이다. 이 엄청난 혼돈을 극복한 인류의 미래는 영성이 충만한 이상적인 사회로 전환될 것이며, 인류의 의식은 하나의 구심점으로 통일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은 홍익인간의 이념하에 한민족이 원형 신교문화가 주도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2025년 올해부터 2027년 정미년까지 세상엔 모든 비밀과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미륵불, 천주님의 도, 즉 개벽의 도가 밝게 드러날 것이다. 또한 2027년 말에는 세상을 구원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영적 지도자가 동방땅에서 출현할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천연두가 대발하면 전세계는 개벽의 운으로 돌입하게 되고, 현 인류 문명의 낡은 시스템은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동학을 창시하신 최수운 선생이 말씀하신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이 아닐런가"이다.
개벽은 낡은 것의 완전한 죽음과 새로운 것의 찬란한 희망이 공존하는 개념이다. 낡은 것에 집착해서 죽음을 따를 것인가, 새로운 것을 찾아 희망을 추구할 것인가는 각자가 전생으로 부터 지어온 업과 인연으로 인한 선택일 것이다. 결국 참된 진리를 알아 보느냐 마느냐의 문제라 생각한다.
“아무리 세상이 꽉 찼다 하더라도 북쪽에서 넘어와야 끝판이 난다. 난의 시작은 삼팔선에 있으나 큰 전쟁은 중국에서 일어나리니 중국은 세계의 오고 가는 발길에 채여 녹으리라.” 하시고 “장차 병란(兵亂)과 병란(病亂)이 동시에 터지느니라. 전쟁이 일어나면서 바로 병이 온다. 전쟁은 병이라야 막아 내느니라. 그 때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이기고 지는 쪽 없이 멸망하리라. 그 때가 되면 천하대세가 너희들에게 돌아가리니 내 일이 일시에 이루어지느니라.” 하시니라. ... “각국에서 와서 오선위기 도수로 바둑을 두다가 갈 적에는 판과 바둑은 주인에게 도로 주고 가느니라.” (증산도 도전 5:415장)
日入酉配 亥子難分 일입유배 해자난분
日出寅卯辰 事不知 일출인묘진 사부지
日正巳午未 開明 일정사오미 개명
日中爲市交易退 帝出震 일중위시교역퇴 제출진
해는 유시에 들어가는데
해시와 자시의 변별하기 어려움에 필적하고
해가 인시, 묘시, 진시에 나오는데 아직 세상일을 알지 못하며
해가 사시, 오시, 미시에 남중하는 때 (2025 을사년, 2026 병오년, 2027 정미년)
나의 도(道)와 세상일이 환히 드러나느니라.
해가 정중하여 문명의 장이 서고 교역이 끝나 장이 파하면
태조가 진방에서 나오시느니라. (증산도 도전 5:362장)
“장차 이름 모를 온갖 병이 다 들어오는데, 병겁(病劫)이 돌기 전에 단독(丹毒)과 시두(時痘)가 먼저 들어오느니라. 시두의 때를 당하면 태을주를 읽어야 살 수 있느니라.” 하시니라. “앞으로 만병이 들어오면 조선의 세상이 되느니라.” (증산도 도전 11:264장)]
정치를 준비하는 젊은 청년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치는 개인적인 명예와 이익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분단 시대에 정치인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 깊이 고민하시고, 나중에 어떤 자리에서든 후배 정치인들에게 어떤 가치를 전달할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정치를 통해 꿈꾸는 목표를 분명히 알고 행동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훗날 여러분이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역사에 기록될 때에도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정치인으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마지막으로 오늘 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45~1950년 남북한 주요 역사적 사건 정리]
1945년: 일본 패망과 한반도 분할
- 8월 6일: 미국,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
- 8월 8일: 소련, 일본에 선전포고.
- 8월 15일: 일본 항복 선언, 한반도 광복.
- 9월 6일: 여운형 주도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 9월 7일: 맥아더 포고령 발표, 미국의 한반도 점령 공식화.
- 9월 8일: 미군 인천 상륙
- 9월 9일: 미군, 서울에 도착해 미군정 시작
- 10월~11월: 김구와 이승만 각각 귀국, 정치적 리더십 활동 시작.
-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개최. (신탁통치 결의)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와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 강화
- 2월 8일: 북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 3월~5월: 덕수궁에서 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 6월 3일: 이승만, 전북 정읍에서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주장.
- 10월 1일: 대구 10월 항쟁.
- 3월~10월: 북한에서 대대적인 토지개혁 시행.
1947년: 냉전 심화와 유엔 개입
- 3월: 트루먼 독트린 발표로 냉전 체제 본격화.
- 5월~7월: 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 7월 19일: 좌익 지도자 여운형 암살.
- 9월: 미국, 한반도 문제를 유엔 총회로 이관.
- 11월: 유엔,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구성 계획 발표.
1948년: 남북 분단 고착화
- 2월: 유엔 소총회, 북한의 선거 거부로 "선거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만 실시" 결정.
- 4월 3일: 4·3 제주항쟁. [서북 청년단]
- 4월: 김구와 김규식, 북한 방문해 김일성과 남북협상 추진.
- 5월 10일: 제헌국회 총선거.
-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 제정 및 공포.
-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 9월 9일: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 10월 19일: 여순 10·19 사건.
1949년: 김구 암살과 농지개혁
- 1월: 대한민국에서 농지개혁법 제정.
- 3월: 김일성, 스탈린에게 남침 계획 제안.
- 6월 26일: 김구, 경교장에서 안두희에 의해 암살.
- 12월: 반민특위 활동 약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 1월: 김일성, 모스크바 방문.
- 5월: 김일성, 베이징 방문.
-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해원의 역사는 아직도 진행중
1945년 광복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까지는 한반도 역사에서 분단과 통일을 둘러싼 국제적 갈등과 국내적 변혁이 격렬히 교차한 시기였습니다. 냉전 체제는 한반도 남북에 극단적인 이념 세력이 자리 잡는 기반을 제공했고, 그 결과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이승만이 각각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러한 이념적 대립은 한반도를 극단적인 반목과 대결의 장으로 만들었으며, 북한은 반미를, 남한은 반공을 중심으로 사상교육을 강화해 한반도는 냉전의 축소판이 되었습니다. 특히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과 협의해 계획한 남침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한반도를 세계 냉전의 중심 무대로 전환시켰습니다.
올해 2025년은 한국전쟁 75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여전히 휴전 상태에 있는 한반도는 최근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으며, 대만해협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또한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국내외적으로 혼란이 가중되는 이 시점에서, 한반도의 미래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까요? 한반도의 미래는 우리의 과거에서 그 비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법과 신도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우리 고대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주관적 이념의 틀을 넘어 현대사에 관한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현재의 문제를 넘어 밝은 미래를 열어갈 통찰력과 비전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