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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광명인 2024. 12. 10. 18:42

[현 대한민국의 정치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붕당정치와 특히 노론과 노론의 태두 송시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암 송시열은 주자학의 대가로 '송자'로 불린, 조선 유학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학문적 이론과 조직을 바탕으로 정권을 잡은 노론이 추구했던 국가는 유학자들이 왕권을 견제하며 그들의 이상으로 각각의 지방을 통치하려는 세상, 즉 '국민을 위한 국가가 아닌 노론의 이상을 위한 그들만의 국가'였다. 조선후기 민중들의 삶은 그들의 부패한 세도정치로 피폐해져갔고, 결국 외우내환으로 조선은 망국의 상황에 접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론 가문의 후예, 이완용은 노론을 대표하여 결국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게 된다. 그들에겐 국가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론 유전자가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무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덕일 박사의 주장이다.]

우암 송시열은 진정 대학자였나?

<허 연>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번이나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다. 그만큼 송시열은 조선역사의 중요한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를 점철한 당파정치의 한 가운데 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송시열에게는 공자나 맹자처럼 '자(子)'자를 붙여 '송자'라고 까지 불린 대학자이자 정치가라는 평가와 사대부의 이익에만 매달려 역사의 흐름을 예견하지 못한채 조선의 발전을 저해한 봉건주의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소장파 역사학자인 이덕일씨가 쓴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 펴냄)는 조선시대의 금기처럼 인식되어온 송시열의 이면을 역사적 시각으로 서술한 책이다.

저자는 조선시대를 좌지우지한 당파인 노론의 태두인 송시열에 비판적시각으로 접근한다. "송시열에게 대학자이자 대정치가라고 호칭해야 마땅하다. 여기에 '대(大)'라는 접두사를 붙이는 이유는 그의 학문이 그만큼 고명하고 그의 정치가 그만큼 고결했다는 뜻은 아니다. '대'라는 접두사를 붙일 만큼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송시열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 기록에서도 엇갈리게 나타난다. 83세의 나이사약을 받고 죽은 송시열을 묘사하는 부분을 비교해보자. 송시열의 당파였던 노론김재구가 쓴 '조야회통'에는 "우암 송시열은 직령의를 입은 후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 전날 밤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더니 이날 밤 규성(奎星)이 땅에 떨어지고 붉은 빛이 우암이 죽은 지붕위에 뻗쳤다"고 적고 있다.

반면 반대파였던 소론나량좌가 쓴 '명촌잡록'에는 "송시열은 계교가 궁하자 다리를 뻗고 바로 드러누웠다. 도사 권처경이 재촉했으나 종시 마시지 않으므로 약을 든 사람이 손으로 입을 벌리고 약을 부었는데 한 그릇 반이 지나지 못해 죽었다."고 쓰고 있다.

한사람은 죽음을 장중하게 부각시킨 반면 한사람은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를 휩쓴 당파싸움은 흔히 '예송논쟁'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기폭제가 됐다.

효종이 죽었을때 효종의 아버지인 인조의 부인이었던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년 입어야 하는 가를 가지고 벌인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서 송시열1년복을 주장했고 3년복을 주장했던 허목, 윤휴, 윤선도 등 남인들3년복을 주장하면서 대립했다.

이 논쟁은 1년복이냐 3년복이냐의 논쟁을 떠나 정치이론과 학문적 근간에 관한 양쪽세력의 자존심 싸움으로 확산됐고 이것이 두세력을 조선시대 내내 대결하게 한 원인이 됐다.

이 예송논쟁의 이면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1년복을 입는 것은 왕가도 일반의 예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들이 왕권을 축소시키고 양반 지주의 힘을 키우기 위한 상징적 행위였다.

반면 3년복은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자는 주장으로 힘을 잃은 왕권을 강화시켜 비대해진 사대부세력을 물리치고 개혁을 단행하자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변화의 기로에 있었다. 신분제는 흔들리고 있었고 상공업의 발달로 평민들의 의식도 바뀌고 있었다. 이 변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였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변화를 거부하고 수구의 길을 선택한다.

정부는 송시열을 중심으로한 세력의 주장에 따라 여전히 주자학을 정치에 적용한다. 그러나 저자는 "당시 주자학은 이미 기능을 다한 학문"이었다고 평가한다. 사대부의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주자학 대신 평민의 자리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새로운 학문질서가 필요한 시기였다는 것이다.

송시열은 또 현종에게 간청해 본관이 달라도 성이 같으면 결혼을 금지하는 법을 시행했을 정도로 과거회귀를 시도했다. 그는 결국 자신의 반대세력인 남인 소생 여인이 낳은 아들이 원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다 사약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가 죽은 5년후 다시 노론이 득세하면서 송시열은 부활한다.

유학자 최대의 영예인 문묘(文廟)에 제향됐고 국가는 국비로 '송자대전'을 간행해 주었다. 그의 영향력조선후기 300년에 걸쳐 계속됐다. 이런 면에서 그는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가 행사한 영향력이 백성들의 삶과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느냐는 점이다.

저자는 여기서 또 반기를 든다. 송시열의 이론과 조직을 바탕으로 조선이 멸망할때까지 정권을 잡았던 노론이 만들고 이끈 나라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닌 노론의 나라'였을 뿐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이 책은 오랜동안 거론이 금기시됐던 송시열에 관한 새로운 논쟁을 촉발시키고 있다. 

출처: [매일경제]


송시열과 노론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내용, 강력추천

[이덕일 교수가 주장하는 노론 송시열과 남인 윤휴의 정책 차이]

송시열 윤휴
1. 조선왕은 왕이 아니라 제후이다. 1. 조선왕은 왕이다.
2. 명분론자로 말로만 북벌 2. 현실론자로 북벌에 진심
3. 신분제 강화를 주장 3. 신분제 완화를 주장
4. 양반은 세금을 내면 안된다고 주장 4. 양반도 세금을 내어야 한다고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