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다시 보는 한국역사와 문화
[역사학은 '사실이 무엇(what)인가?'를 규명하는 학문이지만, 나아가 '왜(why) 그런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는 이유와 배경을 찾는 것이다. 그 다음은 '어떻게(how) 할 것인가?' 즉 해법을 찾고, 가능하면 방향까지 제언하는 것이다. 현재 인류는 '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로 포장됐지만 인간종(homo) 자체의 존속이 위협받은 문명사적 대전환기를 맞는 중이다. 역사학은 이러한 시대정신을 규명하고,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아는 일은 필수적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남과 관계를 맺을 수가 있고, 목적한 일을 성공할 수가 있다.
역사상의 우리 국가들은 '조선'을 모(母)국가로 삼은 하나의 혈연공동체일 뿐 만 아니라 역사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고대 우리가 직접 또는 간접지배를 했던 공간은 중만주와 동만주 일대였다. 우리 민족이 살아온 터는 지구상에서 안전하고, 먹을 게 풍부하며 자연을 친하게 대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생태환경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한민족의 역사 문화를 발전시켜온 고유의 사상,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점검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제는 과거의 낡은 유산인 중화사상과 식민사관의 영향을 벗어나 자신감있고 긍정적인 자세로 자문화와 역사를 평가해야 한다.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하고 뿌리를 뽑아버린 대표적인 2대 사서는 사마천의 사기와 일본서기이다. 결정적인 행위자는 물론 중화사관과 황국사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고려, 조선의 중화주의 유학자들과 일제치하 일제에 부역한 친일 사학자들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대통령의 계엄 선포 및 내란 혐의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은 수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제는 역사의 혼, 즉 시대정신이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뿌리를 상실한 부패하고 썩은 정신들을 척결하고 개혁하려는 듯 하다. 황국사관과 중화사관으로 한민족 역사의 뿌리를 뽑고 역사를 왜곡한 친일과 친중 세력들은 이제 그들이 지은 업보대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올바로 밝히고, 지금의 혼란한 세상을 개혁하여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할 한민족 고유의 사상과 철학을 복원해서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다.]
역사학은 '사실이 무엇(what)인가?'를 규명하는 학문이지만, 나아가 '왜(why) 그런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는 이유와 배경을 찾는 것이다. 그 다음은 '어떻게(how) 할 것인가?' 즉 해결하는 방법론을 찾고, 가능하면 방향까지 제언하는 것이다.
150년 이상 격동기를 거친 한국 지성계와 역사학에서는 필수적인 물음이었다.
세계 질서는 80여 년 만에 뿌리채 흔들리며 '제4차 Great game'에 돌입했으며, 특히 동아시아는 세계질서의 중요한 '힘(power)'이 집중된 충돌의 현장이고, 그 중앙에 한반도가 있다. 한국은 조선 말부터 세계사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격변을 겪었지만 대한민국은 기적적으로 '힘(power)'의 팽창에 성공했다. 하지만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채 군사적인 충돌이 멈추지 않고, 사회는 온갖 갈등과 문제점들로 가득 찼다. 현재 인류는 '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로 포장됐지만 인간종(homo) 자체의 존속이 위협받은 문명사적 대전환기를 맞는 중이다. 그렇다면 역사학은 이러한 시대정신을 규명하고,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아는 일은 필수적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남과 관계를 맺을 수가 있고, 목적한 일을 성공할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지성계와 역사학계는 반성할 점들이 많으며, 거기에는 역사인식과 연구 방법론도 있다.
◆'공간'의 문제
반도사관, 그것도 해양에 포위된 반도를 역사의 전 무대인 것으로 해석했다.
서해(발해 일부를 포함한), 동해(타타르 해협의 남쪽을 포함한), 남해, 동중국해의 일부는 신석기 초기부터 주민들이 항해하며 이동한 무대였고, 서남 해안 지역과 요동만 일대는 신석기 초기부터 어업이 활발했다. 일본열도의 큐슈 지역 및 혼슈의 일부 지역들과는 약 7000년 전 부터 교류가 있었지만, 특히 기원전 4세기부터는 남해안의 많은 주민들이 조직적이고, 연속적으로 남해를 건너 정착했다. 야요이(彌生) 시대의 시작이다. 고분 시대인 6세기 중반까지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는 개별국가이지만 하나의 '체계(system)' 속에 편재된 정치체제들이었다. 일본(日本)이 국가로서 완성되고, 우리와 적대관계로 변한 것은 7세기 중반 이후 즉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부터이다.
이러한 역사상과 지형을 고려한다면 동아시아는 중국 지역, 만주 지역, 일본 열도, 오끼나와 제도, 대만을 거쳐 중국의 남부지역까지 이어지는 육지 안에 넓은 바다가 있는 '다국간 지중해(multinational mediterranean)'이고, 그 가운데(core)에 우리의 활동무대인 한반도와 남만주가 있다. 이른바 해양면적만 230만 평방 km인 '동아 지중해(East asian mediterranean)'이다. 그렇다면 고려 이전의 역사를 이해할 때는 해양활동이 없고 바다에 포위됐다고 배운 반도사관이 아니라 한반도와 만주일대, 그리고 해양을 유기적인 관계로 파악하는 '해륙사관'이 필요하다.
중만주와 동만주 일대도 고려 이전의 원(proto)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직접 또는 간접지배를 했던 공간이다. 또한 때에 따라서 북만주나 동몽골의 일부 지역, 동만주의 북부 지역도 '영향권' 또는 '생활권'이라는 방식으로 우리 역사를 규명하고 이해하는데 활용할 필요가 있다.
◆'시간'과 '주체'의 문제
모든 존재, 특히 역사적인 집단은 언제부터 시작됐는가? 즉 기원의 문제가 중요하다. 이것은 그것을 실현시킨 주체들은 어떤 종족인가, 어떤 말을 했을까? 등과 연결된다. '종족(race)'과 '민족(nation, peoples)'은 꼭 같은 것이 아니다. 종족은 인종의 하위 단위로서 생물학적인 특성으로 유형화된 존재이다. 동아시아 세계만 하더라도 한민족, 투르크족, 몽골족, 퉁구스족, 중국의 한족, 티벳족, 고아시아족 등 종류가 무수히 많다. 개별 종족마다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반면에 다른 종족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민족은 혈연과 언어도 유사하고, 같은 공간에서 오래 살았으며, 생활방식, 신앙 등이 유사하다. 무엇보다도 동일한 역사적인 경험들을 공유한 집단들이다. 차이가 있는데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인들이 번역한 '民+族'이라는 단어 때문에 혼동이 심하다. 특히 우리는 종족과 민족을 구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안 한다.
우리는 외부 종족들이 많이 유입되지 않은 상태로 자연재해와 외적의 침입 등으로 인한 온갖 기쁨과 고난을 공유하면서 역사를 만들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단일 종족'은 아니지만 공질성(동질성과 다르다.)이 강한 '단일 민족'이다. 고려 후기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에는 신라, 고구려, 옥저, 부여, 예맥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했다. 물론 중국의 '후한서' 예전에도 예, 옥저, 고구려는 다 조선의 땅에 있다고 썼다. 그 밖에도 국내와의 사료들을 찾아 비교하면 우리 역사상의 국가들은 '조선'을 모(母)국가로 삼은 하나의 혈연공동체일 뿐 만 아니라 역사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선비계, 거란계도 고대에는 우리와 언어가 통했다는 기록들이 있으므로 '방계종족'이라는 용어를 부여해 우리 역사를 새롭게 본다. 이러한 역사관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해석하면 민족의 기본핵이 윤곽을 드러난 시기, 즉 기원을 청동기 시대로 볼 수 있다. 전 지역에 걸쳐서 큰 규모의 고인돌들과 돌무덤들이 만들어지고, 일부에서 우수한 비파형 동검 등 청동 제품들이 만들어지는 시기이다.
◆인문 및 생태환경의 문제
역사활동의 주체는 '홍익인간'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 즉 '생활인'이다. 때문에 '역사학은 인간학이다(Histography is Humanlogy).' 보통 사람들이 생존과 생활에 필요한 생산물을 얻고, 주거지와 생활방식과 신앙 등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요소는 생태환경이다. 한반도의 육지 생태환경은 잘 알고 있지만, 바다에 대해서는 주목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는 농경 이전에 어업이 먼저였고, 역사시대에도 어업은 생존과 생활에 엄청난 역할을 했음은 유적과 유물들이 증명한다. 우리의 역사상은 한반도와 요동, 연해주 해역의 자연환경과 생태환경을 알아야 산업은 물론이고, 무역, 외교, 전쟁 등을 규명할 수 있다.
만주는 지정학적으로 우리에게 탁월한 가치가 있다. 동아시아는 종족, 문화, 생활양식, 정치체제 등을 고려할 때 '3핵 체제'로 구성됐다. 즉 '농경 중국지역', '유목 북방지역',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 일본열도 등을 포함한 '동방지역'이다. 그런데 힘의 관계를 고려하면 동아시아 지역의 큰 충돌은 주로 남진하는 유목민과 방어하는 중국 세력 간에 일어났다. 따라서 동방은 양 세력의 배후라는 '제3의 위치' 때문에 공격의 필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남만주 지역은 산이 발달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으면 동쪽에서 서쪽 바다까지 길게 뻗은 험준한 산맥들과 사이의 강들이 천연방어선을 만들었다. 따라서 외부세력들은 한반도를 공격할 엄두를 못했다. 고구려가 오랫동안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한 것은 탁월한 지정학적 환경이 활용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지경학적인 환경이다. 많은 이들이 잘 모르면서 터무니 없는 오해를 하지만 우리가 살아온 터는 지구상에서 안전하고, 먹을 게 풍부하며 자연을 동무처럼 친하게 대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생태환경이다. 나는 만주를 5개 지역으로 구분하는데 대부분은 지경학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 요동 지역의 철을 비롯해서 구리 주석 금 은 옥 등의 보석들과 고가의 제품인 말과 각종 모피들이 생산된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는 말 수출국인 동시에 엄청난 모피 수출국이었다. 훗날 러시아가 극동 시베리아로 진출한 이유는 담비 등 모피 때문이었다. 수 백 개에 달하는 송화강과 흑룡강의 하계망도 매우 중요했다. 한반도도 마찬가지였지만 만주의 강은 엄청난 규모의 어업을 할 수 있는 장소였다. 지금도 대규모 어업이 발달했지만, 신석기 시대나 고구려 유적 등에서는 어업이 번성했던 증거들이 발굴된다. 또 강을 이용하여 만주 전역을 운수 물류망으로 연결시켰다. 그렇다면 고구려 발해 등은 당연히 상업이 발달하고, 강에서 활동한 수군들도 있었을 것이다.
◆국제관계 해석, 역사관의 문제
국가적 관점, 민족사적 관점을 넘어 지역사적 관점 즉 동아시아 세계, 더 나아가 문명사적 관점, 즉 유라시아 세계와 연동시키는 거시적이고, 범공간적인 역사관이 필요하다. 실제로 원(原)조선의 붕괴와 위만조선의 건국과 멸망, 부여의 건국 등은 중국 지역의 질서는 물론이고, 흉노의 활동으로 대표된 유라시아 세계의 역학 관계와 연동됐다.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 발해, 고려 등의 역사는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특히 한 국가의 운명 등과 직결된 대전쟁 등은 국제질서와 연동시켜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필자는 고구려와 수 당간에 벌어진 전쟁을 처음으로 '동아시아 국제대전'으로 파악하고, '70년 전쟁'이라는 용어로서 장기적인 관점으로 해석했다. 고구려, 수나라, 당나라, 백제, 신라 등의 주축국들 외에도 왜, 돌궐, 거란, 토번, 사할린의 유귀, 캄차카의 야차,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도시국가들도 정도에 따라 참여했다.
이러한 사관으로 해석하면 사실을 정확하게 규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전개되는 국제관계의 복잡한 실상을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학습효과가 생긴다. 이 밖에도 우리역사를 다시 보아야 하는 새로운 관점들은 많다. 100년 이상 사용되던 용어의 수정과 재조정, 역사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의 점검(때로는 중국의 시각에서 해석한 경우도 있다), 산업과 기술, 무역 등 실생활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면서 동시에 우리 역사의 계승성과 역사발전에 영향을 끼친 사상 즉 이데올로기도 점검해야 할 문제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관들을 적용해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려면 몇 가지 노력들이 필요하다. 최신 학문의 이론과 과학적인 성과를 차용하여 더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인류학, 종교학, 기호학 뿐 만 아니라 미학, 생태학, 유전공학, 동물행동학 등도 공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제는 중화사상과 식민사관의 영향을 벗어나 자문화와 역사를 자신감있게 긍정적인 자세로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검증과 상호비교를 통해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자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한 어떤 결론도 무의미하며,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역사학 박사,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출처: 매일신문